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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4주년 3.1절 을 맞아 독립운동 역사 인물 의인.(강우규 의사) (1)

by Mj0825 2023.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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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 사이토를 저격한 청년 같은 노인, 의사 강우규 님을 아시나요?

출처 :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3039

장사꾼에서 민족교육운동가로.

강우규(姜宇奎)의 본관은 진주, 자는 찬구(燦九), 호는 왈우(曰愚)이며. 다른 이름은 영일(寧一)·강녕(康寧)이다. 1855년(철종 6)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무릉면(武陵面) 제남리(濟南里)에서 태어났다. 슬하에 중건(重健)·건형(鍵衡) 두 아들을 두었다. 가난한 농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를 여윈 탓에 누나 댁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런데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그가 20살 되던 해에도 부친이 살아계신 것으로 되어 있고, 아들 중건이 3심에서 강우규의 사형이 확정된 직후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70세에 가까운 어머니가 살아계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그는 “훤칠하고 당당한 체구에 큰 절의가 있었으며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집안이 매우 가난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고, 이후 한약방으로 생계를 꾸려 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나이 30세이던 1885년(고종 22)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용원면(龍源面) 영덕리(靈德里)로 이사하였다. 홍원에서는 생업을 위해 한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하였다. 25년간 한약방과 잡화상을 경영하면서 많은 재산이 모이자,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계기는 이동휘(李東輝)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908년 이동휘는 신민회(新民會) 활동의 일환으로 함경도 지역을 순회하며 기독교 선교활동과 함께 학교설립을 통한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때 이동휘를 만난 그는 감화를 받아 기독교에 입문하는 한편 사재를 털어 영명학교(靈明學校)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곧바로 장남 중건(일명 건하) 부부 등 가족들을 먼저 러시아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본인도 이듬해인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처음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두도구(頭道溝)에 자리를 잡은 뒤, 만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답사하며 이동휘·박은식(朴殷植)·계봉우(桂奉瑀) 등을 만나 독립운동방략을 모색하였다고 한다. 특히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당시, 계봉우가 그의 집에 2개월간 기거하며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저술하자, 이를 본 그가 안중근의 의거를 가슴속에 새기면서 후일 의거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제정러시아가 한국의 독립운동세력을 탄압하게 되자, 이를 피해 1915년경 우수리강 건너 길림성 요하현(繞河縣)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무렵 그는 하바롭스크에서 가족과 재회하였다 한다. 그가 이곳에 자리한 이유는 남만주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한 그는 처음 몇 호에 불과했던 마을을 100여 호의 마을로 만들면서 신흥동(新興洞)이라 이름하였다. 1917년 봄 신흥동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외에도 30년간 홍원에 영명학교와 교회, 러시아 이만(Iman)에 협성학교(協成學校)와 조선민회(朝鮮民會), 만주 요하현 신흥동에 조선민회, 블라디보스토크에 교회와 노인단, ‘밋가루시카’ 학교 등 학교 6개, 교회 3개, 민회 2개를 설립하여 전도와 민족교육에 힘썼다.

서울역광장에 일어난 의열투쟁.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인 1919년 9월2일 오후 5시. 서울역(당시 남대문역) 앞은 새로 부임해 오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을 맞이하는 환영행사를 위해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3·1 독립운동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9년 전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일이 며칠 지나지 않은 때여서 긴장감이 돌았다. 사이토는 해군 대신 출신인데 새 조선 총독으로 파견됐다. 전임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3·1 독립만세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등 무단통치를 한 데 따른 조선 민중의 고조된 불만을 달래기 위한 책략이 작용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그간 무력에 의한 무단통치가 아닌 문화통치를 표방했다.

총독 도착 예정시간은 오후 3시였으니 두 시간이나 넘게 기다려야 했다. 환영인파 중에는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귀족들과 총독부 고위관리, 군 수뇌부, 하레 영국 총영사 등 외교사절, 재계 인사, 신문기자 등도 있었지만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중근처럼 사이토를 초조하게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사이토가 도착하자 19발의 예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환영 나온 인사들과 악수를 나눈 사이토가 남산에 있는 총독관저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올라 출발하려는 순간, 갑자기 검은 물체가 날아와 마차 주변에서 폭발하며 굉음을 터트렸다. 사이토를 향해 날아간 폭탄임이 분명했다. 이로 인해 광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폭탄의 위력은 대단했다. 현장에서 즉사한 사람은 없었지만 37명의 중경상자가 나올 정도였다. 사이토가 해군 군복을 입은 덕에 파편이 혁대에 부딪혀 군복을 태우는 데 그쳤다. 폭탄이 조금만 더 앞으로 가서 떨어졌더라면 사이토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 중상자 중 장기 손상과 패혈증 등으로 경기도 순사 스에히로를 비롯한 3명이 사망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강우규였다. 폭탄을 던지고 나서 그는 현장을 침착하게 지켜봤다. 사이토가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군중 속으로 천천히 몸을 피해 걸어 나왔다. 이왕 죽기로 각오한 몸, 그는 재차 거사를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폭탄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를 따르는 청년, 허형으로 하여금 폭탄을 구해 오는 심부름을 시키고 서울에서 은신하던 중 같은 달 17일 체포됐다. 그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0월 7일 자 신문에 대서특필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조선의 최고 통치권자인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진 사람이 열혈 청년이 아닌 환갑을 넘긴 65세 노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요즘이야 60세를 청춘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환갑을 넘겨 사는 것이 드문 시절이었다. 1936년 당시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42.6세(남자 40.6세, 여자 44.7세)로 65세면 노인이었다. 매일신보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면 흰 두루마기 차림에 머리카락과 수염이 모두 흰색으로 전형적인 노인의 모습이었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출처 : https://m.segye.com/view/20200902520785

처형 직전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위해 만주에서 온 장남 중건이 마련해 준 한복 두루마기를 입었다. 그러나 사형 집행 당일, 그의 장남은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었다가 집행이 끝난 후에야 풀려났고, 오후 3시 반경 아버지의 시신을 인도받을 수 있었다.

한편 상고심에서 강우규의 사형 결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진주 강씨 종친회는 문중 차원에서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안장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새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신을 선산에 안장할 경우, 조선인의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빈소도, 조문도, 장례행렬도, 조객도 없이 장남 중건과 몇몇 지인들만이 그의 유해를 운구하여 서대문감옥 공동묘지였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현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가매장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이 그의 유해가 운구되는 동안에도 쫓아오며 감시를 하자, 화가 난 중건은 돌을 던지며 “네놈들은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감시해야만 속이 시원하냐!”고 외쳤다고 한다.

그의 묘지는 1956년 10월 유지들의 발의로 수유리 산109번지로 묘지를 이장되었다가 반세기가 다 된 1967년 6월에야

비로소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강우규의 남대문역 투탄사건은 3·1운동 이후 개인이 단독으로 감행한 최초의 의열투쟁이었다. 이 의거는 이후 의열단(義烈團)으로 계승되면서 1920년대 의열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자리잡는 역할을 하였다.

아직도 위풍당당하게 강우규 의사 님의 동상이 서울역 광장에 있습니다.

가실 일이 있다면 한번 봐주세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강우규 의사 님의 시 한편 소개합니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斷頭臺上)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猶在春風)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有身無國)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豈無感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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